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이전 국가들과의 비교 (문단 편집) === 신라정통론과 고려정통론 === 고려왕조는 공식적으로는 [[고구려]]와 [[신라]], [[백제]]를 모두 대등하게 이었다는 역사관을 공식적으로 채택했으며, 그것이 국가의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에서 세 나라를 모두 동시에 [[천자]]국의 격으로 설정해 본기(本紀)에 넣었다는 데서 드러난다.[* '경주 김씨 김부식의 역사관'일 뿐이라고 절하하려는 시도도 있지만 이 책은 분명히 관찬사서고 국왕인 [[인종(고려)|인종]]과 당시 고려 정권이 나라의 역사서로 공식 인증한 책이다.] 그러나 [[태조(고려)|태조]]를 비롯한 건국 주도 집단이 고구려계 [[패서]] 호족이라는 사실과 고려가 [[통일신라]]의 인적 자원과 국토 및 [[삼한일통]] 사상을 물려받았다는 현실 속에 고구려와 신라라는 정체성의 두 축은 고려시대에 고구려-고려 정통론과 신라 정통론이 승화되어 서로 엎치락 뒤치락했다. 고려 정통론자의 경우는 [[무신정변]]을 비판받으면 신라에게 [[후삼국시대]]를 연 원흉이라고 질타하고 뻑하면 반란 일어나고 나당 연합으로 자주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반대로 신라 정통론자들의 경우는 신라가 만든 [[황룡사]] 9층 목탑을 부순 몽골 같은 야만족들의 [[부마]]국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원나라]]보다 [[송나라]]가 더 낫다고 한다. 반면 고려 정통론자는 오랑캐라고 이민족들을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싫어 원간섭기를 재평가한다. 본래 신라는 말갈과 왜구 같은 이민족들에 적대적이었는데 대표적으로 문무왕의 무덤 이야기가 있다. 고려 정통론자는 [[고조선]] - [[고구려]](+[[백제]], [[신라]]) - ([[통일신라]]) - [[고려]]로 정통성을 형성하고 특히 [[고조선]], [[고구려]], [[고려]]와 같은 북방 왕조에는 꽤 높은 평을 준다. [[고구려]]와 [[백제]]의 남정 정책과 고구려의 북벌, 흔히 남정북벌론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좋아한다. 고려의 삼한일통의 원형이 된 신라의 삼한일통에 대해서는 애매한 자세를 취하는데 최초의 물리적인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 자체는 긍정하나 통일신라의 여러 한계를 비판하며 이 시기를 삼국에서 고려로 정통성이 넘어오는 과도기 정도로 해석하고 고려의 통일을 진정한 민족의 통합으로 설정한다. 반면 신라 정통론자는 [[고조선]] - [[위만조선]] - ([[삼국시대|삼국]]) - [[통일신라]] - [[고려]]로 정통성을 보는데, 남정북벌에 대해서는 신중한 편이지만, [[한족]]이 아닌 이민족 왕조인 [[요나라]]와 [[금나라]], [[원나라]]에 대해선 고려 우호론자보다 더 적대적이다. 이런 시각은 대략 [[삼국사기]], [[삼국유사]]로 이어지며 원 간섭기 때 더욱 강해진다.[* 한편 신라정통론자의 경우에도 두 분류로 나뉘는데 전자는 삼국시대부터 신라를 정통 왕조로서 설정하는 시각이고 후자는 삼국시대에는 특정 국가가 정통성을 가지지 못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야 정통 왕조가 되었다는 시각이다. 전반적으로 후자가 우세했으며 이러한 근거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신라만을 본기에 수록하지 않았고 조선시대의 안정복 역시 동사강목을 저술하며 이와 같은 입장을 취했다.] 반면 신라 정통론자들은 고려를 비판할 때 원 간섭기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 상황은 신라 말기 상황보다도 더 최악이고 [[과거 제도]]가 붕괴해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또한, [[절(불교)|사찰]]의 대토지화나 귀족들의 대토지화는 지켜져야할 제도인 [[전시과]]가 유명무실 할 지경이었다. 이는 [[녹읍]]의 부활로 진골들의 토지편입이 심해진 신라보다 더 심각할 정도였다. 왕실의 상황도 다르지 않은데, 왕의 호도 충자 돌림이었고, 제대로 된 묘호나 시호조차도 받기도 어려웠다. 반면 신라의 경우는 말기에 상황이 최악이고 [[골품제]]도가 최악이었어도 충의 이름이 아닌 신무, 문성과 같은 독자적 시호를 받을 수가 있었다. 더욱이 [[공녀]]의 경우도 본시 고려가 원조이기 때문에 신라의 경우는 서남 해안 일대에 여성까지 [[당나라]]에 노비로 팔아넘기는 해적들을 자체적으로 소탕하고 근절했고 관료전이 골품제에 나오는 녹읍을 없애버리고 식읍까지 없애버려 이것과 관련해서 신라 정통론이 불었다. 불교계의 경우도 황룡사 9층 목탑 붕괴를 무능한 고려 왕조가 눈뜨고 지켜봐야했기에 신라 정통론이 상당 부분 불었다. 더욱이 [[나당전쟁]]과 달리 [[여몽전쟁]]은 그보다 더 심각한 재산 피해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는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를 비롯해 그 당시 삼국이 일원이었던 신라의 전쟁만도 못하였기 때문에 이후 신라 정통론이 불어 닥치게된 계기가 되었다. [[조선]] 왕조는 본시 신라 정통론을 정사에 본격적으로 확립한 국가로 삼국기 이후 바로 신라기로 가서 고려 정통론을 꽤 흔들었다. '''실은 조선 왕조도 신라의 장점 못지않게 신라의 여러 문제들을 도저히 지나칠 순 없기에 고려기를 두었다. 조선의 경우는 고려처럼 800년대와 달리 900년대 신라에 집중적인 비판이 모여있다.''' 심지어는 고구려 정통론을 깨기 위해 [[조선]]은 가장 극단적인 신라 정통론을 내세워 신라기 - 조선기라고 해버리고 고려는 생략시켜버린 예도 있다.[* 조선이 고려를 역성혁명으로 무너뜨렸기 때문에 고려를 역사에서 강조하기 거북했고 그러한 이유로 고구려보다도 신라가 더욱 중시되었다. 또한 어찌되었든 한반도의 최초 단일 국가이기도 했고 조선이 숭상하던 유학 또한 신라 하대에 최치원을 비롯한 유교의 성인들이 등장했기에 조선은 신라를 긍정했다.] 예를 들어 [[현종(고려)|현종]]에 대해 그가 절간에 땅주는 것에 비판했는데 신라의 [[문무왕]]도 그걸 하지 않았다고 하며 비판했지만 이내 신라에게도 족내혼과 [[장보고]] 모살 사건을 비판한다. 또한 [[종교]]의 부패까지도 비판한다. 오히려 고려 성종은 역으로 절간에 땅주길 금했고 무분별한 사찰도 정리했다. 하지만 [[발해]]까지 흡수한 첫 나라라서 [[대광현]]이 귀순하고, 흥요국도 멸망해 여러 유민들이 또 [[고려]]로 가게된다. 그래서 [[삼국유사]]에선 발해 이야기가 처음으로 나온다. 이후 [[조선]] 왕조에서도 [[유득공]]의 [[발해고]]가 나왔다. 사실 [[조선]]에서도 신라 정통론에 대해 편협했다는 인식이 있다. 대표적인게 신라 정통론을 주장하던 [[허조]]의 주장에 대해 [[세종(조선)|세종]]이 우문현답으로 답하였다. 또한 한반도의 역대 시조를 모두 모신 [[팔전]]을 건립하기도 했다. 다만 위에서 상술한 고구려-고려 정통론과 신라 정통론의 논쟁은 한국사에서 어떤 국가에 더 의미를 두느냐에 대한 논쟁이지 타 국가를 매도하는 주장들은 아니다. 또한 두 개념은 서로 대립하지만 분절적인 성격은 아니기에 삼국사기나 팔전 등과 같이 두 입장을 모두 차용한 경우도 존재하고 사실 고려 조정이나 조선 조정이나 공식적인 입장은 이러하였다. 단지 역사의 무게중심을 신라에 더 둘 것이냐 고구려-고려에 더 둘 것이냐 정도의 차이이다. 애초에 국가 간의 계승 관계나 정통성 등과 관련된 논쟁은 현대인들의 관념처럼 무자르듯 구분할 수 없는 성격이다.[* 이러한 연유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냐 신라를 계승했냐는 논쟁이 무의미한데 이는 마치 부모 중 한쪽을 선택하라는 말과 같다. 고려는 두 국가를 모두 계승했고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계승 의식은 백제까지 포괄한다. 단지 상술했듯 자주성, 호전성이 강조될 때에는 고구려 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울었고 중국과의 관계, 안정성을 추구할 때에는 신라로 조금 더 기울었을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